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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다낭/후에/호이안

[스티커 in 베트남] 평화의 도시 후에 Hue


   

   

평화의 도시 후에, ①후에왕궁, 티엔무사원 - 스티커 in 베트남

   

   

얼마전 하나투어 스티커로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었는데요.

 

드뎌 7박9일의 베트남 여행기 시작합니다~

   

베트남 하면 흔히 생각하는 여행지는 호치민이나 하노이 인데요.

 

제가 간 곳은 베트남의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었어요.

 

제일 먼저 소개해 드릴 곳은 후에 입니다.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리다가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수도가 된 후 현재의 지명인 후에(Hue)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가 지냈던 화려한 도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가 되어 대부분 황폐화되었지만

 

9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며 현재 활발히 복원 사업 중에 있습니다.

 

 

 

 

 

<후에왕궁>

   

 

왕의 거주지 였던 후에왕궁은 1805년 자롱 황제의 명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1832년 민망 황제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왕궁은 5.2㎢의 면적으로 프랑스 건축가인 바우반의 설계에 따라 프랑스식과 베트남식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건축되었습니다.

 

 

 

 

 


 

 

왕궁 바로 안쪽에 위치한 왕궁 수호 대포 입니다.

 

왕궁과 왕국의 평화와 안녕을 상징하는 대포인데요.

 

한쪽에는 사계절을 상징하는 4개의 대포가 있구요.

 

반대쪽에는 금속, 나무, 물, 불, 땅 오행을 상징하는 5개의 대포가 있습니다.

   

 

 

 

 


 

 

후에왕궁의 수호 대포를 지나면 넓은 광장이 나오는데요.

 

왕의 기사라 불리는 국기 게양대가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1809년에 만들어졌고 태풍에 의해 파괴 된 후 다시 만들어 졌다가 전쟁 때 손실 된 것을 1969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합니다.

 

3단으로 이루어진 국기 게양대는 각 층마다 의미가 있다고 해요.

 

아래층부터 자연의 섭리, 인간 세계, 천국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국기 게양대와 일직선에 놓인 오문은 왕궁의 정문으로 가운데 3개의 문과 양 옆의 2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가운데 문은 왕이 통행하는 문, 가운데 문 옆 양쪽 문은 대신이 통행하는 문, 사이드의 2개의 문은 일반 신하가 통행하는 문이었다고 해요.

 

태양이 정상에 오는 정오에 태양와 오문, 국기 게양대가 일직선을 이루어서 정오 문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문 위의 누각은 왕이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상을 하사하던 장소였는데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가 1945년 이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하니..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드는 장소였습니다.

   

 

 

 

 


 

 

오문을 통과하면 보이는 곳은 바로 중국 자금성을 모델로 만든 태화전입니다.

 

태화전으로 향하는 다리는 3개가 있는데요.

 

이 역시 가운데 다리는 황제만이 통행하던 곳이라고 해요.

 

ㅎㅎ 저도 황제가 된 기분을 만끽하며 가운데 다리를 건너 태화전으로 향했습니다.

   

 

 

 

 


 

 

황제의 즉위식이나 국빈 영접이 이곳 태화전에서 거행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인지 태화전 앞 마당에는 낯익은 풍경이 보였어요.

 

우리나라 궁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죠~

 

바로 관직에 따라 자리를 위치할 수 있게 해둔 표식인데요.

 

낮은 관직부터 높은 관직 순서로 황제에게 가까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태화전은 두 개의 당으로 나눠지는데요.

 

후방 중앙에는 황제가 앉았던 옥좌가 있었습니다.

 

뭔가 위풍당당! 위엄이 느껴지는 태화전~!!

 

 

 

 

 


 

 

황제의 나라답게 왕궁 내부에선 용을 많이 볼 수 있는데요.

 

황제의 용은 발톱이 5개라는 사실 아셨나요?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왕들은 모두 용의 발톱이 4개인 곤룡포를 입었지만

 

고종황제는 용의 발톱이 5개인 황룡포를 입었답니다~

   

 

 

 

 


 

 

왕궁 내에서 청동으로 된 커다란 솥을 발견하고 이건 뭘까.. 했는데요.

 

후에 왕궁에는 9개의 왕실 세발솥이 있는데요.

 

후에 왕궁의 세발솥은 중국의 전통을 따라 인, 장, 영, 의, 순, 선, 우, 현 등 세상 만물을 가리키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세발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크기가 클 수록 왕권이 안정되었던 것으로 간주한다고 해요.

 

우리나라 궁궐에도 이런 비슷한 것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화마를 막아주고 불이 났을 때 소화수로도 사용하였죠~

 

비슷한듯 다른 문화를 알아가는 것도 여행의 재미가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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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왕궁을 보면서 느낀 점은 참~ 화려하다 인데요.

 

언뜻 보고 그냥 색감이 화려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단순히 색을 칠한것이 아니라 알록달록 도자기로 꾸몄더라구요.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도자기 문화가 많이 발달 했었다고 합니다.

 

 

 

 

 


 

 

후에왕궁은 황제가 살았던 곳인 만큼 황제가 햇빛이나 비로부터 자유롭게 왕궁 내부를 다닐 수 있도록 회랑이 참 잘 되있더라구요.

 

빨간색 기둥과 황금색 등으로 꾸며진 멋진 회랑 덕분에 저도 뜨거운 태양을 피해 왕궁 내부를 다닐 수 있었어요~ ^^

   

 

 

 

 


 

 

후에왕궁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황비나 후궁들이 머물던 곳을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연못도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여기저기 폐허가 된 왕궁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폐허가 되었는데도 이정도라니...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복구가 잘 되고 나면... 얼마나 멋있어 질지.. 생각만 해도 찌릿~ 하더라구요.

 

복구가 된 후에왕궁을 꼭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티엔무 사원>

   

후에를 상징하는 티엔무 사원은 후에에서 5km 떨어진 하케 언덕에 위치해있습니다.

   

 

 

   

 

 

1601년 뚜안 호아 성의 통치자인 응우옌 호앙이 건축하였고, 1844년 띠에우 찌 황제 떄 현재의 모습을 갖춰 이후 후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띠엔무라는 여성이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사원을 건립해야 하며 이를 통치자 응우옌 호앙이 추진해 줄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팔각형의 7층 구조로 이루어진 탑이 사원의 입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탑의 양 옆쪽으로 두개의 작은 탑이 위치해 있는데요.

 

오른쪽 탑은 1715년 건립 되었고 아래 부분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가 있습니다.

 

왼쪽 탑은 1710년 건립되었고 다이 홍 청 이라는 종이 걸려 있습니다.

   

 

   

   



 

 

사원에는 미래불, 석가모니불, 과거불 세 개의 부처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향불을 피우며 기도를 드리고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티엔무 사원에는 수도중인 수도승들을 볼 수 있는데요.

 

한쪽 머리카락만 길게 남아 땋고 있는 모습 부터

 

지드래곤의 미역 스타일까지~ 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신기하더라구요.

 

알고 보니 이곳의 수도승들은 수양한 정도에 따라 머리카락을 깍는다고 해요.

 

머리카락이 남아있는 분들은 아직 더 많은 수도 과정이 남았다는 거겠죠~

   

 

 

 

 

   

 

 

티엔무 사원이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차 때문인데요.

 

전쟁 중 티엔무 사원은 불교도들의 항거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1963년 사원의 수도승인 꽝 득(Quang Duc) 스님은 남베트남 정부의 불교 탄압 정책에 저항하며 사이공에서 분신 자살을 기도했는데요.

 

당시 타고 있던 자동차가 티엔무 사원 뒤 뜰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당시 어떤 기자에 의해 사진으로 찍히고 세상에 알려지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세계 각국의 관심이 생기고 종전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분신을 한 꽝득 스님의 신념에 존경스럽기도 하면서 안타까움도 들더라구요.

 

 

 

 

 후에의 문화유적지 1탄은 이렇게 마무리 되구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후에의 문화유적지 2탄이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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