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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동성

공자의 고향 곡부(취푸), 공자의 흔적을 만나다! - 중국 산동성 여행

   

 

 

공자의 도시, 곡부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 공부(孔府)

 

   

   




   

   

   

   

 

공자의 도시, 곡부

 

   

   

산동성의 중남부에에 위치한 곡부는 공자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와 관련된 유적지인 공묘(孔廟), 공림(孔林), 공부(孔府) '3' 남아있는

 

곡부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유교의 산실이자 공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곡부는 여전히

 

전통적인 분위기 많이 남아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많이 떠나기도 하며,

 

공자를 존경하는 중국인들도 성지처럼 이곳을 찾아온다.

 

도시에는 옛날에 지어진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내성과 외성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성벽 안쪽인 내성지역에는 2층을 초과하는 높은 건물이 없다.

 

이는 공자에게 공자의 사당인 공묘 내에 최고 높이인 대성전보다

 

높게 짓지 못하도록 제한정책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노력으로 여전히 역사적인 흥취 묻어나는 도시, 곡부로 지금 떠나보자

   

   



   

    

곡부의 공묘(孔廟), 공림(孔林), 공부(孔府) 3 가장 먼저 소개할 곳은 '공부(孔府)'이다.

   

   



   

   

   

'공부'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이다.

 

공부의 또다른 이름은 '연성공부(衍聖孔府)'이다.

 

송나라 인종이 공자의 46대손을 '연성공()'으로 봉하면서 곡부를 다스리게 하면서 붙어진 것이다.


이후 공자 후손들의 봉호가 계속 높아지면서, 공부 역시 규모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지금의 16만㎡에 달하는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공부는 , 청시기에 걸쳐 완성되었다.

 

 

   

   



   

    

공부로 들어가는 정문의 문턱은 높은 편이다.

 

또한 옆에 걸린 글귀에 있는 한자 변형된 한자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 위의 획이 지워져 있다. 이는 공부 안으로 '' 막힘없이 들어오라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공자 가문의 부귀와 복을 위하는 장치였다고 한다.

 

   

   



   

   

   

정문을 지나 공부 내에 위치한 이문(二門).

 

공부는 내택문(內宅門) 기준으로 앞쪽으로는 연성공이 업무를 보던 관청이 위치해있고


뒤쪽으로는 연성공의 사적인 생활 공간인 주택과 정원이 위치해 있다.

 

   

   



   

    

이문의 현판에는 '성인지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문을 지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는 문은 '중광문'이다.

 

하지만 중광문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문은 결혼식이나 황제가 찾아왔을 경사스러운 , 중대한 제사활동에 한해 열린다고 한다.

   

   



   

    

중광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공부의 모습을 만날 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은 공부에서 관청 역할을 하던 대당, 이당, 삼당 대당이다.


대당은 연성공이 중요한 의식을 행하거나 정부의 관리들을 맞던 곳이다.

 

   





   

   

대당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육부 관아가 있다.

   

   





   

   

   

비어버려 허전한 느낌마저 감도는 대당 내부에는 공부를 지키던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켠에는 글자가 적힌 팻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는 공자 가문에서 받은 관직 이름들을 적어놓은 것으로 이를 통해서도 공자의 가문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있다.

 

관직은 자금성 안을 말로 이동할 있는 안되는 높은 관직이었다고 한다.

 





   

   

   

대당을 빠져나와 뒷편으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오면 바위와 부딪히게 된다.

   

   


   

   

   

특이하게 생긴 바위의 이름은 '북태호석'이다.

 

호수에서 나온 북태호석은 앞에 떡하니 놓여있는게 답답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바위도 나름 의미가 있다.

 

바로 앞에 있는 바위는 문이 열리면 산이 보인다는 의미의 당시 유행하던 건축기법이라고 한다.

 

또한 내부를 없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당 뒷편으로는 또다른 관청인 이당과 삼당이 있다.


이당은 5개의 방으로 되어있고, 공문을 받고 발송하거나 연성공을 거들던 관원의 집무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삼당은 이당의 뒤에 있는데 가족내부의 일들을 처리하던 곳으로 동쪽의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객실이었다.

 

 

   



   

   

   

삼당을 지나면 연성공의 사적 공간인 내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내재 안으로는 공씨가 아닌 남자들은 들어갈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켠으로 남자 하인들이 내재 안으로 물을 건내주기 위한 조그마한 물길이 있었다.

   

   



   

   

   

내재로 향하는 길에 화려한 그림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용의 머리, 기린의 , 송아지의 발을 특이한 동물의 이름은 ''이다.

 

8신선의 무기를 가진 '' 태양을 먹기 위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태향을 먹게 '' 결국 타서 죽게 되고 만다. 그래서 '' '과욕' 의미한다.

 

연성공은 문을 지날 때마다 탐을 보며 '탐내지 않고,

 

정치를 청렴하게 것이다'라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연성공 뿐만 아니라 당시 3 이상의 관리의 집에는 ''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된 궁이나 고택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내가 사학과라서 답사를 유독 좋아하기도 하고, 미술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다.

 

궁이나 건축 등에 깊은 조예가 있거나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대로 구경하고 우리나라의 궁과는 어떤 것이 비슷하고

 

어떤 것이 다른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부를 처음 마주했을 , 우리나라의 궁과 많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색상이라던가 세부적인 것은 차이가 있어도 전체적인 형태나 기와,

 

기와 아래의 섬세한 그림까지. 많이 닮은 보였다.

 

하지만 공부 안으로 깊숙히, 깊숙히 들어갈수록 공부는 중국 고유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궁과는 너무나도 다른 멋이었다.

 

   

   



   

   

   

한쪽에서 연주소리가 들려오길래 쳐다보니

 

공부의 직원인지, 관광객인진 모르겠지만 남자 분이서 피리를 연주하고 계셨다.

 

(사진상 각도 때문에 분처럼 나왔지만.)

 

공부의 분위기와 무척 어울리는 피리 소리였다.

 

   

   



   

   

   

드디어 후원으로 들어섰다.

 

관아와 후원을 구분하는 내택문 안에는 가문의 연회 등을 집전하던 전상방,

 

가족의 웃어른 처녀들이 살던 전당루, 후당루, 내택의 뒤에 위치한 정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연성공이 대대로 살아온 전당루에는 76 연성공이 4명의 부인과 함께 살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직접 들어가 수는 없고 유리창을 통해서 내부를 살펴볼 있다.

 

가장 아름다웠다는 76 연성공의 네번째 부인의 방을 살짝 들여다 보았다.

 

한쪽 벽에는 네번째 부인의 사진도 걸려 있다.

 

   

   


   

   

   

모든 것을 스케일로 압도하는 중국답게

 

공부 역시 규모가 굉장히 크다. 그래서인지 길이 이러저리 많이 나있다.

 

약간 복잡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어져 있어

 

길을 잃거나, 관람코스에서 이탈하게 되진 않는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공부의 제일 끝인 정원에 다다른다.

   

   



   

   

   

정원은 공자 가문으로 시집 자신의 딸을 위해 건륭제가

 

자금성의 후원과 똑같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정원에 길은 건륭제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한다고 한다.

 

멋진 정원에서 건륭제의 딸을 향한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느낄 있었다.

 

   

   



   

   

   

정원 안쪽으로는 공자 가문을 소개하는 자료관이 있다고 한다.

   

   


   

   

   

46 연성공으로 부터 시작되어 880 동안 32 연성공을 배출한 공자 가문.

 

공자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공부는 문화혁명 당시, 마지막 연성공인 77 연성공, 공덕성이

 

피신을 가면서 지금까지 주인 없는 집으로 남아있다.

   

주인은 없지만, 공자의 흔적을 찾아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더이상 쓸쓸하지 않은 공부(孔府)이다.

   

   

   

   

   

   

- 여행은 하나투어의 지원으로 다녀왔습니다 -

   

   

   



   

   

   



   

http://www.youtube.com/stick2r

   

   

   


   

   

   

   

   

   

 

 

원문작성 : http://blog.naver.com/yamapi0719